오타 가즈요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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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개요
오타 가즈요시는 오다 노부나가,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무장으로,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했다. 임진왜란 중 실책으로 영지를 얻어 우스키 성주가 되었으며,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담했다. 전투 패배 후 구로다 요시타카의 중재로 항복하여 목숨을 건졌고, 이후 교토에서 은거하다가 사망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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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타 가즈요시 | |
---|---|
기본 정보 | |
씨명 | 미노오타 씨 |
이름 | 오타 가즈요시 / 오타 무네타카 |
이명 | 무네타카, 마사노부, 마사유키, 시게마사, 통칭: 고겐고, 히다노카미, 법호: 소젠 |
시대 |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- 에도 시대 전기 |
출생 | 생년 미상 |
사망 | 겐나 3년 (1617년) |
관위 | 종5위하히다노카미 |
주군 | 니와 나가히데→나가시게→도요토미 히데요시→히데요리 |
씨족 | 미노오타 씨 |
부모 | 아버지: 오타 무네키요 (고겐고, 겐타자에몬) |
형제 | 가즈요시 (무네타카), 무네야스 |
자녀 | 가즈시게 (다카미쓰) (미노노카미) |
특기 사항 | 무네타카의 계보는 단절되었지만, 동생 무네야스의 계보는 의사로서 존속했다. |
2. 생애
오타 가즈요시는 오다 노부나가,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. 1592년 임진왜란 때 군 감시역으로 제1차 진주성 전투, 남원성 전투, 울산성 전투 등에 참전했다.[4][2][5][1]
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조카 마사나리는 동군, 아들 가즈나리는 서군에 참여했고, 가즈요시는 병을 핑계로 거성에 있었다. 전투 후 이시다 일파가 숙청되자 교토에서 은거하다 1617년 사망했다.[2]
2. 1. 초기 생애와 오다 가문 섬김
오타 가즈요시는 미노 국 출신으로, 선조는 다타무라를 영지로 하여 다타 씨를 칭했다. 본성은 스가와라 씨이며, 아버지는 오다 노부히데를 섬겼다.[1] 가즈요시는 처음에는 다뉴 나가히데를 섬겼으나, 1585년 나가히데 사후 다뉴 가문이 감봉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.[1][2]2. 2.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
가즈요시는 1587년 규슈 평정과 1590년 오다와라 정벌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.[2] 1592년 임진왜란(분로쿠·게이초의 역) 당시 군 감시역(軍目付) 중 한 명으로 참전했으며,[4] 120명을 이끌고 제1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했다.[4][2]임진왜란 당시 가즈요시는 점령지에서 이산된 조선 백성들에게 귀환을 촉구하는 훈령을 발표하기도 했다.[2] 1593년 오토모 요시무네가 임진왜란에서의 실책으로 개역되자, 가즈요시는 분고국 오이타현에서 5만 3,200석을 추가로 받아 총 6만 5,000석의 영주가 되었다.[2] 이는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친분 덕분이었다고 전해진다.
1597년 정유재란(게이초의 역)에서는 남원성 전투와 울산성 전투에 참전했다. 특히 울산성 전투에서는 큰 부상을 입으면서도 분전하여 공을 세웠다.[5][1][2] 1598년 히데요시 사후에는 후쿠하라 나가타카, 구마가야 나오모리 등과 함께 문치파에 가담했으나, 울산성 전투에서의 추격전 문제로 가토 기요마사 등 무단파와 사이가 나빠져 1599년 5월 질거 처분을 받았다.[5][2]
2. 3. 세키가하라 전투와 그 이후
1600년 4월, 가즈요시의 영지에 네덜란드 배 리프데호가 표착했다. 가즈요시는 이를 구조하고 나가사키 부교에 보고하여 배를 오사카로 회항시켰다. 이때 선원들에게서 목조 에라스무스 상을 선물 받았다.[6][7]같은 해 9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담하여 세타의 가라하시(瀬田の唐橋)를 경비했다.[2] 아들 가즈나리는 붕고 우스키에 남아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가신 마쓰이 야스유키가 지키는 기즈키성 공격을 명받았으나 패배했다.[9] 가즈요시는 본 전투에서 서군이 패배했음에도 항복하지 않고 우스키 성에서 농성했으나,[2] 구로다 요시타카의 중재로 10월 4일 성을 나와 항복했다.[2] 가즈요시는 요시타카의 도움으로 영지는 몰수되었지만 목숨을 건졌고,[2] 이후 출가하여 소젠(宗善)이라 칭하며 교토에서 은거했다. 1617년 병으로 사망했다.
3. 평가
오타 가즈요시는 오다 노부나가,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인물이다. 1592년 임진왜란 때 감시역을 맡아 제1차 진주성 전투, 남원성 전투, 울산성 전투 등에 참전했다.[1][2][5]
임진왜란 당시 점령지에서 흩어진 조선 백성들에게 귀환을 촉구하는 훈령을 발표하기도 했으며,[2] 남원성 전투와 울산성 전투에서는 여러 곳에 화살 상처를 입으면서도 공을 세웠다고 전해진다.[5][1][2]
1600년 윌리엄 아담스 등이 탄 네덜란드 배 리프데호가 그의 영지인 우스키만 구로시마(지금의 오이타현 우스키시)에 표착하자, 이를 구조하고 나가사키 부교에 보고하여 배를 오사카로 보냈다.[6] 이때 선원들에게서 목조 에라스무스 상(일본 국가지정 중요문화재)을 선물받았다.[7]
참조
[1]
논문
[2]
논문
[3]
서적
大日本古文書. 家わけ 三ノ一(伊達家文書之一)
{{NDLDC|1908790/345}[...]
東京帝国大学
[4]
서적
松浦叢書 郷土史料
{{NDLDC|1214367/97}}[...]
吉村茂三郎
[5]
서적
徳川大名改易録
崙書房出版
[6]
서적
家康の経営戦略国づくりも天下泰平もカネ次第
株式会社秀和システム
[7]
서적
コロナショック後を生き残る日本と世界のシナリオ
すばる舎
[8]
문서
在大分県速見郡日出町大神。大神氏の居城。
[9]
문서
史料綜覧11編913冊246頁.
[10]
문서
史料綜覧11編913冊272-273頁.
[11]
문서
史料綜覧11編913冊277頁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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